케네디 메도우 노스에서부터 시에라가 끝나고, 노스 캘리포니아가 시작되는 사우스 레이크 타호까지는 중간에 마을을 들릴 필요없는 구간이었다. 결국 절경의 시에라 마지막 구간이었다. 사막이 끝나감도 아쉬웠듯 시에라가 끝나감도 아쉬웠다.
시에라에서 사진을 참 많이 찍었는데 마지막 구간 5일동안은 사진이 20장이 채 되지 않는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풍경이나 이벤트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더 이상 곰통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어 소로나 패스로 들어와 곰통을 두고 출발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왠지 비가 많이 올 것 같았는데 텐트를 치고 나니 비는 금새 그쳤지만 귀찮아서 그냥 그대로 쉬기로...
PCT를 시작하고 사막에서 아주 잠깐 비를 맞았고 두 달만에 처음 맞는 비였다.
다음 날은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옆에 다시 은진이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누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고 생각을 나누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항상 없어지고 나면 깨닫는게 사람인 것 같다.
간혹 비가 오는 때도 있었다. 그러면 한번 경험했던 터라 나뭇잎 무성한 나무 아래 은진이와 판쵸의를 덮고 1시간씩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그 좁은 공간 안에서 또디야 쌈을 싸서 점심을 먹고 기다리면 금새 비가 그치고 또 해가 났다. 비가 오면 걷기는 힘들어졌지만 자연을 생각하면 짧은 소나기는 고마운 일이었다.
도로가 나오는 지점에 트레일 엔젤이 있다는 말에 열심히 내달렸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아무것도 없이 휑했다. 문득 서운한 생각이 들어 근처에 있는 주차장을 향하니 아저씨들이 한무리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괜찮으시면 맥주 한캔만 얻어 먹을 수 있을까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물론이죠."
아저씨 한분이 아이스박스를 열어 고르라며 웃어보였다.
"고맙습니다."
은진이거까지 2캔을 챙겨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섰다. 트레일 엔젤이 없을 때면 우리가 트레일 엔젤을 만들곤 했다.
산중에 들어서 다시 한참을 걷고 있는데 나보다 앞서가던 한 청년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 지더니 그를 따라 잡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의 얼굴이 많이 지쳐보였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는 스위스에서 온 갓 대학생으로 입학 하기 전 4개월의 시간이 있어 PCT를 하러 왔다고 했다. 시간이 없다보니 단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서 많이 지쳐있다고 했다. 우리가 시에라를 끝내는데 80일 정도가 걸렸는데 그는 55일만에 끝낸거라고 하니 얼마나 쉬지 않고 걸어온 것일까?
"전 시에라만 하고 스위스로 돌아가려구요."
PCT를 시작하기 전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2달이 되지 않는 사이에 몸이 반으로 줄어 있었다.
마라톤을 인생과도 비유를 많이 하지만 난 PCT가 작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열정을 쏟는 것도 긴 싸움 앞에서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긴 싸움에 체력 안배도 열정 안배도 적절해야 했다.
청년과 1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은진이가 한참이나 앞서 있을 것 같아 열심히 내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잠자리를 맡아놓고 은진이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었다.
시에라의 마지막 잠자리를 청하고 다음 날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케네디 메도우 노스부터는 시에라 구간이었지만 시에라의 분위기가 많이 사라져 있었다. PCT가 끝나고 나서 뒤돌아보니 이 구간은 노스 캘리포니아의 색이 더 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를 만나 히치 하이킹을 해 마을로 들어갔다. 미국에는 차 안에 온갖 짐을 넣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차를 태워주곤 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히피' 그들이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친절하고 따뜻했다.
'천상의 절경' 시에라도 어느덧 끝이나고
길고 긴 2,700km의 마지막 캘리포니아 구간, 노스캘리포니아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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