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반복이 주는 자극에 대한 적응이 역치를 높여 갔다.
길 위에서 어떤 일들도 웬만해선 가슴을 울리지 못했다. 모든 것이 비슷했다.
3개의 패스를 지나자 시에라의 아름다운 풍경마저도 이제는 윈도우 바탕화면의 아름다운 사진을 보는듯한 느낌일 뿐이었다. 오늘 Mather Pass를 지나면 시에라에서 넘어야할 Pass는 총 9개가 남는 셈이었다.
마더 패스를 만났다. 패스는 고도가 급격히 높아지는게 아니라 서서히 길게 높아졌다. 하지만 오르막은 오르막인지라 만만하지 않았다.
오르막에 상대적으로 강한 내가 먼저 치고 올라간 뒤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내려가 은진이의 배낭을 매고 같이 오르는 방법을 썼다. 은진이는 오지말고 기다리라고 했지만 딱히 해줄수 있는 것이 없다보니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내 배낭을 들다가 은진이껄 맬때면
'이렇게 가볍다고? 근데도 엄살이야?'
하는 못된 생각도 하기도 했다 ㅋㅋ
마더 패스에서 신발도 벗고 깔창도 벗고 한량처럼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은진이의 깔창 한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 20분은 쥐잡듯이 찾았는데도 결국 찾지 못해 그냥 출발해야 했다. 별거아닌 깔창이지만 하루에도 수십키로를 걷는 우리에게는 꼭 필요했다.
마더 패스를 지나자 긴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지도를 보니 Muir Pass까지는 30키로는 걸어야 정상에 닿을 수 있어 오늘은 적당 고도까지만 내려오고 내일 뮤어패스를 오르기로 했다.
열심히 내려왔는데도 눈 앞을 보니 아직도 한참이나 끝이 보이지 않게 걸어내려가야 했다. 꽤나 긴 내리막이었다. 내려갈 때는 하이킹 폴을 앞다리 삼아 짐승처럼 열심히 내달렸다.
시에라는 Pass와 Pass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계속 반복하며 걸어야했다.
자연은 참 신기했다.
어느 고도 이상이 되면 울창했던 숲이 사라지고 온 세상이 바위가 되더니 어느 고도 이하가 되면 온 세상이 바위였다가 우거진 수풀이 되었다. 수풀 안으로 들어오니 이제는 길게 자란 풀들이 성가시기 시작했다.
시에라에는 크고 작은 강이 많이 흘렀다. 산 중에 거대한 강이 있다는 그 스케일이 한국에 사는 나에게는 참 신기했다.
특히 2017년에는 일본인 두명이 강을 건너다가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다고 했다. 강의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자리를 잡은 곳 근처에 정말 큰 강이 산중에 흐르고 있었다.
영화 '가을의 전설' 이런 곳에나 나오는 그런 대자연을 실제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살짝 벅차올랐다.
내리막의 끝에 닿으니 길게 평지가 이어졌지만 캠핑을 할 만한 곳이 없어 계속 길을 따라 걷다보니 불을 지피고 있는지 연기가 나는 쪽으로 따라 들어가보니 3명의 하이커가 저녁을 즐기며 불을 쬐고 있었다.
우리도 한쪽으로 자리 잡고 저녁을 해먹었다. 지겹기도 했지만 그럴때면 생에 언제 이렇게 또 무한정 캠핑을 해보겠냐는 생각도 머리 속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밥을 먹고 내일 걸을 길을 분석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큰 강줄기가 흐르며 만드는 커다란 물 소리가 자장가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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