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중경(重庆,Chongqing)] 대한독립만세, 중국 내 마지막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방문
본문 바로가기
2017년 중국 여행

[중국여행, 중경(重庆,Chongqing)] 대한독립만세, 중국 내 마지막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방문

by 빵호빵호 2022. 12. 19.
728x90
728x90

중경에 대해서 알아보다보니 마지막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당연히 방문해보기로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인물들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 제국에게 양도한 행위는 무효이며, 포기한 주권은 대한국민에게로 승계되었다는 정신이 확립되었다(대동단결선언). 이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김규식)를 파견하였고, 일본에는 장덕수를 파견하여 2.8 독립 선언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소식들이 식민지 조선에 전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이 생겼고, 태상황 고종의 사망으로 군중이 운집한 상황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의 결과 상하이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창설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로는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여운홍, 현장운, 김동삼 등 29인이 있었다. 이 중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는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 그만큼 창립 당시에 신한청년단의 영향은 강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게 신한청년당이었으니 당연하다.)

김구도 신한청년당에 관여하였지만, 정부 수립 당시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수립 며칠 후에 임시정부를 찾아왔다. 김규식도 신한청년당원이었지만 당시 미국에서 이승만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고 있어서 임정 수립 당시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아래 지도의 B로 중경의 유명한 관광지인 홍애동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홍야동 주소 : 중국 Chongqing, Yuzhong District, Jialingjiangbinjiang Rd, 纸盐河街37 邮政编码: 400011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重庆大韩民国临时政府旧址 : 중국 충칭 시 위중 구 邮政编码: 400010

 

임시정부는 1919년 조직된 뒤 상하이에 청사를 두고 활동해 왔으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일본의 대대적 검거 열풍이 불어서 1932년을 끝으로 상해를 떠나야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주요 거점을 장악하고 내륙으로 밀고 들어와 임시정부도 점점 중국 내륙 깊은 곳으로 옮겨야했다.

임시정부는 1945년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8·15광복을 맞고 현재 강북삼성병원의 경교장에 마지막 청사로 이동했다.

더불어 27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환국한 뒤, 임시정부청사는 충칭시의 도시개발계획으로 한때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국내의 대기업들과 정부가 힘을 모아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1995년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고한다.

저 멀리 보이는 반가운 한글

 

매주 월요일이 휴관이면 관람 시간은 09:00~17:00로 16시 30분에 마지막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입장료를 별도로 없다.

우에서 좌로 읽어야한다

5개의 건물이 있다

집무실이 있던 건물도 있고 영상을 틀어주고 기념품을 파는 곳도 있었다.

아쉽게도 사진은 그리 많이 찍지는 못했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영상도 틀어준다

김구 선생님 ​

 

한바퀴 돌아보며 찬찬히 구명을 마치고 다음 여행지인 홍애동을 향했다.

고국도 아닌 타국에서 지원도 없이 후손들을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한 조상들의 고마움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가운데 길을 두고 양 옆으로 건물이 있다

 

728x90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