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5권 율리우스 카이사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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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 5권 율리우스 카이사르 2

by 빵호빵호 2017.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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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쟁을 마치고 겨울이 되었을때 원로원의 최종권고를 받은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에서는 겨울철에 루비콘 강을 건널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해 준비가 늦었고 싸움터는 이탈리아 반도가 아닌

루비콘 강 유역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를 찌른 카이사르 군대는 로마까지 진격했고, 원로원 대다수와 폼페이우스, 그 해의 두 집정관 모두 로마를 떠났다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한 카이사르였지만 이탈리아와 갈리아지방만이 카이사르 편이었고, 이와는 다르게 당시에 폼페이우스는(에스파냐 총독을 지내며 에스파냐와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관계로, 해적 소탕을 하며 그리스 및 소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로, 또 북아프리카 및 지중해 일대가 폼페이우스 편이었다고 볼수있다)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속주에서 걷는 세금도, 원로원이나 폼페이우스쪽 사람들이 가진 경제력이 더 컸다)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다

 

로마 점령이후 카이사르는 동쪽에 있는 폼페이우스에게 바로 가기보다는 지중해 서쪽 지방인 에스파냐로 진격했다

갈리아 전쟁과는 달리 내전에서 카이사르는 싸워서 이기기 보다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쪽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군사적인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같은 로마인을 죽인다는게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역사의 결과를 말할때 이러했고, 이러했고 쉽게 말할 수 있으나 실상 카이사르는 에스파냐 점령 후에 귀환길에 군대의 파업도, 쿠리오의 북아프리카 전쟁 실패로 2만이 넘는 군사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의 기강을 잡아 무사귀환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폼페이우스와 맞서 난황을 대처해 나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테지만, 아니면 그에게 시련은 헤쳐나가는 하나의 게임이었을지도 모른다

 

종종 우리는 상황이 조금만 힘들어져도 멘붕이라며, 그 상황안에 생각이 머물러 다른 생각을 아무것도하지 못한다

그 사람의 진가는 상황이 좋을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상황안에서 어떠한 타개책을 마련하고 실행하는지가 말해준다

 

서쪽의 에스파냐 정리 이후, 폼페이우스파가 있는 그리스로 가서 첫 대결인 디라키움 공방전에서는 패배하지만 대평원에서의 전투인 파르살로스 회전에서는 수적 열세(기병이 1천 vs 7천)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다

한니발의 칸나에 회전 이후에는 기병을 적극 활용하여 배후에서 둘러싸서 쌈싸먹기식의 전투가 교본이었으나, 카이사르는 그런 기병의 중요성을 알았고, 말의 특성 또한 잘 알고있었다. 말은 발에 무언가 채이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해 돌격력이나 기동성을 주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했고 카이사르는 그것을 주지 않고, 전투에서의 강점인 기병을 무력화 시키다 못해 약점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투에서 패한 폼페이우스파는 아프리카, 이집트,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졌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살해 당하게 된다

이후 공화정 체재의 지속을 원했던 폼페이우스파가 있는 아프리카 전쟁을 마지막으로 카이사르가 주도하는 내전기는 끝이 나게 되고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거행하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체계를 바꾸기가 훨씬 어려운 법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자신 자신을 개혁해야하기 때문에 자기개혁, 특히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의 자기 개혁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또한 변화를 주도하는 이는 사람들에게 그거 잘 되고있는데 굳이 왜 그러는데? 라는 질문을 제일 먼저 받기 일수다

 

성장하는 로마에게 공화정이 잘 작동하는 정치체제 였다면 제국으로 나아가는 로마에게 공화정은 불합리가 많다는 인식은 술라에게도, 키케로 에게도, 카이사르에게도 공통으로 느껴졌다

 

권력을 손에 쥔 카이사르는 국가개혁에 다방면의 변화를 꾀했다

달력개정, 통화개혁(국립 조폐소 신설하여 원로원이 가진 조폐권을 국가에 줌), 시민권 문제(북아틸라아 속주의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 부여), 정치개혁, 금융개혁(조폐소 설치 후 로마 제국 전체의 기축 통화를 로마화폐로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금화 은화의 가치를 고정), 행정개혁, 해방노예 등용(조폐소의 조폐 3인 위원회의 초대 위원의 신분은 해방노예), 사법개혁(셈프로니우스 법(죄 지은 사람에게 재판을 하지 않고, 항소할 기회도 주지 않은체 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이 평민의 대변자인 호민관의 제안으로 서입되어 원로원파의 반격을 받아 유명무실해진 것을 되살림, 배심원도 원로원만 맡을 수 있는 것에서 일정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자격을 줌으로 계급 투쟁 종결), 사회개혁, 수도 정비, 굣와 의사 중요성 강조 등 국가 전반에 걸쳐 개혁을 실시 하였다

개인적으로 그는 선경지명을 갖추고, 국가를 사랑한 야심가였다고 보여진다

 

이후 파르티아 원정을 끝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려 했던 카이사르의 목적은 정복이아니라 유프라테스강을 방어선으로 확립하는데 있었다

더 이상의 의미 없는 영토 확장이 아닌 내부에서의 국력 강화를 통해 팍스 로마나를 이루고자 한 카이사르는 원정 출발 3일전인

3월 15일에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제정이 아닌 소수 통치체제인 공화정을 추구하는 원로원의 암살자들에게 암살 당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제정보다는 상대적으로 다수인 공화정이 조금 더 민주적으로 느껴지고, 폐해가 적다고 느껴질지 모르나 세월이 흐르다 보면 원로원 출신의 가문이 생기게 마련이고 명문 높은 가문의 자손들은 큰 노력없이 얻는 것들이 생기고, 누리는 권리들이 당연하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의사결정을 내릴 가능성 또한 높아 민주적이라거나 폐해가 적다고 볼수만은 없다고 생각된다

 

카이사르의 죽음이후 원로원 암살자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그것은 그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었다

로마시민들은 분개했고,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후계자는 옥타비아누스가 되었다(최초에 옥타비아누스가 누구야? 라며 로마시민들은 의문을 품을 만큼 그는 어린 소년에 불가했고, 카이사르의 충복이었던 안토니우스가 반발하였으나 레피두스와 함께 원로원의 권한을 얻은 제 2차 3두정치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책임감과 일을 꾸준히 지속하는 의지가 있는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았고, 그를 양자로 선택했다

하지만 군사적 경험과 능력이 부족함을 알고 아그리파를 옆에 붙여 주었고, 카이사르의 운영 방침이었던 관용과는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살해에 관여한 사람들과 공화주의자들의 살생부를 작성하여 피의 숙청을 끝냈다

 

로마는 일단 양분화 되었는데, 동부는 안토니우스, 서부는 옥타비아누스가 차지했다

안토니우스가 동부를 차지한데는 당시에는 동부가 경제력도, 발전면에서도 우위에 있었고, 카이사르가 하지못한 파르티아 점령을 완수하면

로마세계가 자연히 그에게로 기울어 질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서로를 의심하며 대립의 칼날을 세우고 있었을때 옥타비아누스의 외무장관격인 마이케나스는 브린디쉬 협정을 맺어 3두 정치의 각 일원에게 통치권을 인정해 주었고(안토니우스 동부, 옥타비아누스 서부, 레피두스 남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 파르티아 원정 등 자신의 길을 걷게되었다 (정실이 있었던 안토니우스에게 이중결혼은 로마인들에게 반감을 샀고, 파르티아 원정 실패 후 소국을 침략해 이기고나서 이집트에서 개선식을 올린것 또한 로마인에게 개선식이 어떤것인지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반감을 사며 점점 로마에서 멀어져갔다)

 

후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적으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고립시키고, 로마인들에게 그들과의 전쟁이 대의명분이 있다는걸 심어주었다

악티움 해전에서의 최종 승리자는 옥타비아누스였고, 로마의 제정시대의 문이 열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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