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T, Pacific Crest Trail] 58화. 짧은 만남, 긴 인연
본문 바로가기
2018년 미국 PCT(Pacific Crest Trail)/North California

[PCT, Pacific Crest Trail] 58화. 짧은 만남, 긴 인연

by 빵호빵호 2023. 3. 4.
728x90
728x90

다음 날 아침, 커다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시작되자 기분이 계속 쳐졌다. 오히려 좋은 날씨가 기분을 더 다운되게 만드는 역설이 되어 버렸다.

숲속을 지나서 능선을 만났다. 능선의 정상에 오르기 전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앞질러와 능선에서 쉬고 있었다.

"PCT 하는거에요?"

제일 먼저 도착한 할머니가 물었다.

"네."

"와 대단하네요. 멕시코에서 여기까지 걸어온거죠?"

"네. 근데 저보다 더 잘 걸어서 벌써 훨씬 앞쪽에 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저는 한명인걸요. 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누군가가 중요한게 아니라 중요한건 당신이 여기까지 온거니까요."

갑자기 굳어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니 비교하지 말고 나의 걸음을 걸어야지 하며 생각했는데 어느새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나의 의미를 찾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한 결과로 의미를 찾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할머니의 말에 자극을 받아 생각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빨리 길을 나섰다.

고마운 할매와 할배들

 
 
온통 초록이라 눈은 정말 건강해지는 것 같았다 ​

PCT는 미국 서부에 이어진 여러개의 National Forest(국유림)을 따라 길을 걷는다.

총 9개라고 봤던 것 같은데 국유림은 또 여러개의 Wilderness(황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황야를 하나씩 지날 때도, 국유림을 하나씩 지날 때도 하나의 퀘스트를 깨는 기분이 들었다.

Granite Chief 황야로 들어섰다.

새로운 영역으로 또 들어간다

 

오후에는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바람막이를 입고 배낭에는 레인커버를 씌우고 걸었다. 비가 약하게 와서 걸을만하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비를 피해 나무 밑으로 숨어 들었다. 텐트를 쳐야하나 계속 가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그래도 비가 서서히 줄어 들더니 이내 햇살이 나 무지개가 생겼다. 사진기에는 다 담지 못했지만 겁나 큰 무지개였다.

대왕 무지개

다시 길을 걷고 있는데 4L짜리 물통을 든 동양 남자가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외관에서 중국 사람의 느낌이 강했는데 말을 걸어오는데 한국 사람이었다 ㅋㅋ 그는 사우스 레이크 타호부터 시작해서 여기를 일주일 째 연습만 하고 있다고 했다. 하이커들 모두 가방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밥 해먹는 코펠이나 스토브도 준비해오지 않고 오로지 스팸만 20개 정도 들고 다닌다고 했다 ㅋㅋ

'뭐지?'

그는 정말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물통도 손에 들고 다니는.... 자신은 매일이 캠핑같을 거라고 외국인들이랑 어울려 매일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그럴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걷기만 하니 뭐하는건가 싶다고 했다. 맞다. PCT를 하다보면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거지?' ​

한국에 돌아온 후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몇년 전에 잠시 마주했던 그 우유 사나이가 먼저 연락을 취해왔다 ㅋㅋ 그 때 그 물통 들고 다니더 사람이라며 ㅋㅋ 아직도 가끔씩 그와 연락을 주고 받는데 언젠간 술도 한잔하기로 했다.

또 어김없이 하루가 지났다.

해가 뜨면 걷고 해가 질 때쯤 잠을 자고 이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또 하루가 지난다 ​
728x90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