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T, Pacific Crest Trail] 91화.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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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미국 PCT(Pacific Crest Trail)/Washington

[PCT, Pacific Crest Trail] 91화. 인연

by 빵호빵호 2023.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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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지옥같은 밤을 보내고 나서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싫어 침낭에서 꾸물대던 평소와는 달리 부리나케 일어나 짐을 싸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 추위는 지독했다.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혀 있었다.

불과 며칠, 몇주 전 온 세상은 나뭇잎으로 푸르고, 단풍으로 붉었는데 이렇게도 빨리 변할 수 있을까?

다시금 자연의 냉혹함에 몸서리를 떨었다.

 
 

한동안 높은 고도에 눈은 계속 쌓여있었다.

어젯밤 혹시라도 고도가 낮은 곳에서 자겠다고 욕심내서 계속 걸었다면 엄청난 추위에 떨었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순간 순간의 선택이 어쩌면 삶을 종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워싱턴에서는 눈이 녹은 덕분에 신발이 젖은 경우가 참 많았다

​길은 다시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티가 나는 것은 수목의 변화 그리고 쌓인 눈이 녹음의 정도이다. 눈 속에 난 발자국 위를 따라 걸으매 금세 신발이 다 젖어 버린다. 발은 시려웠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눈 쌓인 길을 한동안 걷지 않아도 된다.

은진이는 진작에 나를 앞서 걸었다.

'어디쯤 있을까?'

다리가 아파 배낭을 내려놓고 배낭 가장 높은 곳에 준비해둔 견과류 점심을 꺼내었다.

수개월 동안 점심은 견과류였던 것 같다. 무슨 다람쥐도 아니고 견과류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던데 아마 아인슈타인급의 두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눈 쌓인 높은 곳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푸른 수풀 가득한 따뜻한 곳에서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고도가 낮아지니 눈은 어느새 사라졌다

"오빠!"

남과 북의 갈림길이 있다는 표지판 아래 은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빠지면 마을을 향하는 길이 있었다.

"오빠, 우리 그냥 동쪽으로 빠져서 마을로 가서 레이븐 송 집으로 가자."

레이븐 송(Raven's Song)은 여성 최초 PCT 완주자로 워싱턴의 끝자락에서 트레일 엔젤을 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 그러자."

은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은진이는 먼저 길을 나서겠다며 배낭을 들러메고 출발했다.

"오빠!"

두어시간 걸었을까? 은진이는 어디있을까 계속 걱정하던 찰나 저 멀리서 손을 겁나게 흔들고 있었다. 느긋한 성격의 은진이라 괜히 걱정되어 빨리 걸어 갔더니 앞쪽에는 차 한대가 서 있었다.

"큰일날뻔했다. 이 아저씨 막 갈려던 찰나였어!"

산속 깊은 곳에 사람도 전혀 없을 것 같은 곳에 다행히 사람이 있었다.

한마디의 영어도 잘 못하는 은진인데 어떻게 아저씨를 잡아뒀냐 물어보니

"Boy Friend, Come!"

이라고 계속 말했다고 한다 ㅋㅋ

아저씨 덕분에 다행히 20km를 넘는 거리를 차를 타고 올 수 있었다. 우리가 가려는 방향과는 맞지않아 교차로에서 내리고 아저씨는 아저씨의 길을 향했다.

해가 있을 때 아저씨가 내려줬는데 차가 워낙 잡히지 않아 결국 해가지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진아, 여기 근처에서 텐트치고 자거나, 마을까지 걸어가거나, 히치를 계속하거나 이렇게 방법이 있을거 같은데 어떻할까?"

차는 많이 지났지만 비오는 밤 살인자같은 모습을 한 우리에게 차는 잠시의 시간도 내어주지 않았다.

"...."

은진이는 대답이 없었고 나도 딱히 방법을 몰랐다.

그런데 우리가 내려온 그 사람없을 것 같은 방향에서 차 한대가 내려오자 괜히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미친듯이 손을 흔들었다. 도로 한복판에 차가 지나지 못하도록 서서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인가요?"

우린 또 구구절절 PCT 하이커인에서부터 시작해 힘든 상황을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좋다며 원한다면 자신의 집에서 하루 자고 가도 좋다고했다. 그러니 희한하게도 사람 마음이 괜히 이 아저씨가 우리를 살인하려고하면 어떻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단... 가자.'

아저씨의 집은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아담한 집이었다. 계속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 은진이가 먼저 씻고 나도 씻고 짐을 풀고나니 조금씩 경계심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아담했던 집​

 

"배고프죠? 냉장고에 뭐든 꺼내먹어도 좋아요."

아저씨의 냉장고에는 먹을거리가 가득했다. 미국인들의 집에는 항상 먹을게 많았다. 냉장고에도 많았고 창고에도 많았고 찻장에도 많았고 식탁에도 많았다 ㅋㅋ 전쟁이라도 날테면 두달은 거뜬히 먹을만큼 다들 식량이 많았다.

우리도 얻어 자는 주제에 참 얼굴도 두꺼웠다. 그 와중에 소고기를 꺼내서 구웠다 ㅋㅋ

아저씨를 불러 저녁을 같이 먹으며 한참을 이야기 나눴다.

"저도 한 때는 돈이 많았어요. 그게 다 자식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는데 아내와 이혼하고 자식도 다 크고 나니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우리가 원할때는 곁에 있어주지 않다가 왜 이제와서 아빠 노릇을 하냐고... 관계는 정원과 같아요. 관심과 사랑을 주면 잘자라지만 햇빛과 물이 없으면 어느새 시드는 거죠... 섭섭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해보면 내 잘못이죠.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갈림길에서 마을을 향하는 동쪽이 아니라 PCT 길이 이어진 북쪽을 향해 계속 걸었다면? 첫번째 히치 하이킹을 해줬던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저씨가 자신의 집에서 하루 자고 가라고 했지만 그냥 마을에서 여관을 잡고 잤다면? 수많은 가정들이 있지만 시점과 상황과 선택의 수많은 요소들이 만나 사람과 사람의 연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어쩌면 내 선택도 내가 한다고 믿지만 이미 정해진 것 같기도, 내가 생을 살면서 만날 사람들도 정해진 것 같기도 하다.

살인마라고 생각했었던 아저씨... 너무 순박하고 좋았던 사람인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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