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T, Pacific Crest Trail] 93화. 뜨거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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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미국 PCT(Pacific Crest Trail)/Washington

[PCT, Pacific Crest Trail] 93화. 뜨거운 안녕

by 빵호빵호 2023.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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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세상은 서리로 뒤덮혀있었다.

시작과 동시에 커다란 산을 하나 넘어야했다. 추울 땐 차라리 큰 산을 하나 넘는 것이 좋았다. 걷기 시작한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몸에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건너편에 커다란 설산이 아름다웠다. 고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산의 나무들까지도 볼 수 있어 힘을 낼 수 있었다.

 
 
정말 아름답다

스위치 백의 전형적인 모습 산이 가파를 때 빙빌 둘러가게 만들어 놓은 길을 스위치 백이라 한다

산 하나를 또 올랐다 정상에 오르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다시 눈길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걱정스럽고 싫었던 눈길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낭만적이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사람은 생각보다 더 많이 상황 속 동물인 것 같았다.

아무 생각없이 걸었다.

 

이제 더 이상 그렇게 걱정하던 폭설도 걱정되지 않았다. 폭설이 내리더라도 어떻게든 국경에 갈 생각이었다.

 
 
 
 
 
노란 침엽수는 워싱턴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것 같다 ​

 

내가 PCT를 했던 2018년 워싱턴 주 캐나다 국경인근에 불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불이난 당시에 PCT 하이커들은 캐나다 국경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는 불이 진정되었지만 길은 폐쇄되어 우회길을 걸어야했다.

이제 우리의 마지막 Wilderness다

쭉 내리막을 내려가니 다시 푸른 산이었다. 다행히 따뜻한 곳(?)에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짐을 싸고 미친듯이 걸었다.

막상 막바지에 다다르니 왜이렇게 거리가 줄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ㅋㅋ 진득하게 걸으며 시간에 맡기는 수 밖에 없었다.

 
 
해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차이는 무지하게 크다. 산에 가면 더 크게 다가온다

하루종일 걷고 나니 어느새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가다말고 멈춰서서 은진이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귀에 이어폰을 꽂아서 토이의 '뜨거운 안녕' 노래를 틀었다.

'조금 더 볼륨을 높여줘~ 비트에 날 숨기게~ 오늘은 모른척해줘~'

원래부터 토이의 뜨거운 안녕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PCT를 하면서 마지막 즈음에는 꼭 이 노래를 들어야지 했는데 생각이 났다. 넘어가는 해를 보며 이제는 내일이면 더 이상 걸을 일 없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고 후련하고 또 섭섭하고 섭섭했다.​

지는 해와 함께 PCT와도 작별인사를 나눈다

"진아, 우리 그만 걷고 오늘 여기서 잘까?"

10km만 더 가면 캐나다 국경이었다. 원한다면 2시간 정도 조금만 더 무리해서 캐나다 국경까지 닿을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루라도 더 이 곳에서 텐트를 치고 매트를 깔고 자고 싶었다. 말없이 은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호수가 보이는 높은 언덕 위 우리는 텐트를 치고 마지막 식사를 준비했다.

'휭~'

바람이 불면서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에라이 그냥 갈걸 그랬나?'

괜히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낭만에 젖어있던 내 자신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래도 오늘 밤만 넘기면 드디어 그렇게 밟고 싶었던 캐나다 국경에 닿을 수 있었다.

밤새 또 바닥의 한기에 제대로 잠도 못잤지만 마음이 자꾸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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